{"TbSeoulmetroStOrigin":{"list_total_count":274,"RESULT":{"CODE":"INFO-000","MESSAGE":"정상 처리되었습니다"},"row":[{"SUBW_ID":"2518","STTN":"화곡","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예로부터 땅이 기름져 벼가 잘되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누렇게 익은 벼가 황금물결의 계곡처럼 물결치는 풍경을 이루었다고 하여 유래됨"},{"SUBW_ID":"2530","STTN":"공덕","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우리말로 좀 높은 곳을 \"더기\" 또는 \"덕\", \"언덕\"으로 호칭하는데 공덕동 일대는 대개 만리현, 아현, 대현 등 고개마루에서 서남쪽으로 펼쳐 내려간 언덕진 지대이기 때문에 이지역을 옛날에 우리말로 \"큰더기\",\"큰덕이\",\"큰덕\"으로 불려지던 것이 당시 음이 비슷한 한자의 공덕(孔德)으로 된 것으로 보여진다."},{"SUBW_ID":"2624","STTN":"상수","SBWY_ROUT_LN":"06호선","STTN_ORGN":"상수동의 옛 지명은 서강방 수일리계였는데 한일합방 후 서강면 상수일리가 되었다가 상수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상수동이란 동명은 강가의 마을 중에서 가장 위쪽에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SUBW_ID":"2625","STTN":"광흥창","SBWY_ROUT_LN":"06호선","STTN_ORGN":"조선시대 경기와 3남 지방에서 거두어들인 세수미를 쌓아 두었었다가 관리들의 녹봉을 지급하던 곳으로 그 규모는 1년에 쌀 19,000석, 대두 18,000석을 보관할 정도의 대규모 창고가 있었다 하여 광흥창이라 하였다."},{"SUBW_ID":"2626","STTN":"대흥","SBWY_ROUT_LN":"06호선","STTN_ORGN":"대흥동은 \"동막하리\"라 하여 인접한 용강동과 함께 독을 구워 파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지역으로 \"독마을\"로 불려졌다. 일제시대 이곳은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에 들어가게 되면서 옹막, 옹리의 지명이 동막리로 변경되기도 했다. 1936년 경성부의 대흥정이 되었으며 그후 몇 차례 행정구역의 통폐합을 거쳐 1946년 10월 오늘의 대흥동이 되었다."},{"SUBW_ID":"2627","STTN":"공덕","SBWY_ROUT_LN":"06호선","STTN_ORGN":"우리말로 좀 높은 곳을 \"더기\" 또는 \"덕\", \"언덕\"으로 호칭하는데 공덕동 일대는 대개 만리현, 아현, 대현 등 고개마루에서 서남쪽으로 펼쳐 내려간 언덕진 지대이기 때문에 이지역을 옛날에 우리말로 \"큰더기\",\"큰덕이\",\"큰덕\"으로 불려지던 것이 당시 음이 비슷한 한자의 공덕(孔德)으로 된 것으로 보여진다."},{"SUBW_ID":"2713","STTN":"수락산","SBWY_ROUT_LN":"07호선","STTN_ORGN":"수락산이 바위산이기 때문에 물이 스며들지 않고 곧바로 흘러내려 수락산으로 불렀다는 설과 산에서 잃어버린 아들 수락이를 찾기위해 어머니가 수락아, 수락아하고 불렀다고 해서 수락산이 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SUBW_ID":"2714","STTN":"마들","SBWY_ROUT_LN":"07호선","STTN_ORGN":"예전 상계동에 역참기지가 있어 말들을 들에 놓아 키웠기 때문에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과 상계동 일대가 삼밭이어서 순우리말인 마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 두 가지가 있다."},{"SUBW_ID":"2723","STTN":"면목","SBWY_ROUT_LN":"07호선","STTN_ORGN":"옛날 말을 먹여 기르던 성의 문이 있어서 구문게, 구문계, 곰계등으로 부르던 곳이다.  면목이란 말목장 또는 목문(牧門)의 소재지로 마목, 문목 등의 발음과 비슷하고, 목장을 앞에 두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으며, 1954년 8월 15일부터 중계, 하계, 면목리 등이 합해져 면목동이라 유래되었다.  그 후 기존 주거지 및 상권과 혼합된 지역으로서 지명과 동일하게 역명이 지어졌다."},{"SUBW_ID":"2733","STTN":"학동","SBWY_ROUT_LN":"07호선","STTN_ORGN":"학동은 마을모양이 학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학실, 학곡동으로 지칭되었다."},{"SUBW_ID":"0215","STTN":"잠실나루","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송파구 신천동 1번지에 위치한 잠실나루역은 역사 인근을 흐르는 성내천의 이름을 따서 성내역으로 명명 되었다가 2010년 8월 9일에 \"잠실나루\"로 역명이 변경되었다."},{"SUBW_ID":"0220","STTN":"선릉","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선정릉은 삼성동 135-4번지 65만평 부지에 조선제9대 성종과 계비정현왕후 윤씨의능인 선릉과 제11대 중종을모신 정릉이 있어 흔히 삼릉공원이라고도 불리는데 능의 봉분이 세곳에 따로떨어져 있다하여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SUBW_ID":"0227","STTN":"낙성대","SBWY_ROUT_LN":"02호선","STTN_ORGN":"고려시대의 공신 강감찬장군의 출생지로 큰별이 떨어지던날 밤 태어났다는 전설에 따라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낙성대라 칭하였다."},{"SUBW_ID":"0230","STTN":"신림","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역이 위치한 신림동은 본래 서원리, 신림리, 난곡리로 나뉘어 있다가 1911년 신림리로 통합된 후,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신림동이 되었고 이후 역명으로 지어졌다."},{"SUBW_ID":"0313","STTN":"녹번","SBWY_ROUT_LN":"03호선","STTN_ORGN":"녹번이란 지명은 \"녹번이\" 란 고개에서 녹색을 띠는 천연구리(한방약용)가 나와 녹반현(碌礬峴)으로 부르다 변음되어 \"녹번이\" 고개로 불려졌고 역 이름은 이에서 유래한다."},{"SUBW_ID":"0314","STTN":"홍제","SBWY_ROUT_LN":"03호선","STTN_ORGN":"홍제라는 지명은 고려때부터 이곳에 홍제원이 있었기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홍제원은 서울 근교의 국립여관일뿐 아니라 조선말까지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으로 그 규모가 컸다고 전해온다."},{"SUBW_ID":"0315","STTN":"무악재","SBWY_ROUT_LN":"03호선","STTN_ORGN":"역이 있는 지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무악재는 한양 천도에 주요역할을 한 무학대사의 \"무학\"에서 연유하여 무악현, 무악재라고 칭하였다. 또한 인근 인왕산의 산세가 험준하고 호랑이가 많아 여러 사람이 모여서 재를 넘었다하여 \"모아재\" 라고도 하였다."},{"SUBW_ID":"0433","STTN":"사당","SBWY_ROUT_LN":"04호선","STTN_ORGN":"사당동은 옛날 이곳에 큰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으로 전해온다. 이곳 관악산기슭에는 사적 제247호로 지정된 백제 요지가 있다. 즉 이곳은 백제 중기 이후의 토기 생산지로한강변의 백제 요지로는 유일한 곳이다."},{"SUBW_ID":"2545","STTN":"군자","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옛날 어느 왕의 일행이 거동하다가 마침 이곳 남일 농장터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날 밤 동행하던 왕비가 옥동자를 낳았으므로 이곳을 군자동이라 하였다고 전하며 지금도 이곳을 명려궁터라고 부르기도 한다."},{"SUBW_ID":"2548","STTN":"천호","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원래 지명은 곡교리로 옛날부터 이 곳이 인가 수 천 호가 살만한 지역이 되리라는 풍수지리설에서 동명을 따온 것이다."},{"SUBW_ID":"2558","STTN":"오금","SBWY_ROUT_LN":"05호선","STTN_ORGN":"해당 직역인 오금동의 이름을 따서 역이름을 오금역이라 지었는데, 일찍이 이곳에 오동나무가 많았고 가야금을 만드는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설과 병자호란 때에 인조가 신하의 등에 업혀서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는데 이 동네가 온통 진흙뻘이어서 인조를 업은 신하의 다리가 오금이나 잠겼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SUBW_ID":"2613","STTN":"불광","SBWY_ROUT_LN":"06호선","STTN_ORGN":"불광동이란 지명은 이 근처에 바위와 절이 많았는데 그중 부처의 서광이 어린 불광사가 위치함으로 유래되었으며 이곳은 조선왕조때 한성부 관할구역으로 수리봉 산밑에는 산돼지가 많이 내려와 농작물에 피해를 입은 저서현이라는 고개도 있다."},{"SUBW_ID":"0231","STTN":"신대방","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신대방동은 360년전에 \"높은절\"과 번뎅이(번당리라고하는데 낙천군과 연령군의 묘를 모신 계동궁 연못이 있던곳)라는 두 마을로 이루어진 곳이다. 1936년 4월 1일 경성부로 편입되 면서 당시의 신갈리와 번대방리를 합하여 신대방으로 하였다."},{"SUBW_ID":"0232","STTN":"구로디지털단지","SBWY_ROUT_LN":"02호선","STTN_ORGN":"구로동은 옛부터 불리어오던 동명으로 나이많은 노인9명이 오래도록 장수하였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한국 수출산업공단이 인접하고 있어 구로공단역으로 명명되었다. ※ 2004년 10월 1일부로 구로디지털단지로 역명 변경되었음."},{"SUBW_ID":"0317","STTN":"경복궁","SBWY_ROUT_LN":"03호선","STTN_ORGN":"경복궁은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한후 새왕조를 상징하는 궁전을 1395년 창건했던 초기에는 비교적 소규모였으나 태종, 세종때에 이르러 증축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250년 후인 1869년 고종때 이르러서야 왕권확립 차원에서 오늘날의 규모로 재건립되었다."},{"SUBW_ID":"0434","STTN":"남태령","SBWY_ROUT_LN":"04호선","STTN_ORGN":"역이 있는 지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남태령의 이름이 여우고개로 불리고 있을때 서울로 가던 정조가 고개 이름을 묻자 여우고개로 답하기가 상스러울 것을 염려한 시종들이 서울에서 남쪽으로 맨 처음 큰 고개이기에 남태령이라 답했다고 하여 이후 이 고개를 남태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SUBW_ID":"2527","STTN":"여의도","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예로부터 내화도, 라의주로 불렸던 섬으로 홍수에 잠길 때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에 양말산이 머리를 내밀고 있어 부근 사람들이 그것을 \"나의 섬\", \"너의 섬\"하고 지칭하던 데에서 이것이 한자말 여의도(汝矣島)로 호칭됨"},{"SUBW_ID":"2616","STTN":"구산","SBWY_ROUT_LN":"06호선","STTN_ORGN":"경기도와 도경계를 이루는 뒷산의 산 모양이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어, 옛부터 그 아래 마을을 구산동이라 부른데서 붙여진 이름"},{"SUBW_ID":"2617","STTN":"새절","SBWY_ROUT_LN":"06호선","STTN_ORGN":"새절(신사)역은 2000년 12월 15일 개통하였습니다. ‘새절’은 새로운 절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서 새로울 신(新) 절 사(寺)자가 인용되어 새절이라 합니다.  신사(新寺)는 경성부까지는 은평면 신사리로 되었다가 1950년대에 신사리가 신사동으로 바뀌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신사라 부르고 있습니다.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서울 지하철 3호선 신사(新沙)역과 역명이 중복되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신사(新寺)를 고유어로 풀이한 새절을 역명으로, 신사를 병기역명으로 사용하였습니다."},{"SUBW_ID":"2618","STTN":"증산","SBWY_ROUT_LN":"06호선","STTN_ORGN":"증산동 뒤에 있는 산의 모양이 시루와 같이 생겼으므로 시루메라 하며, 시루는 물이 새어 좋지 않다하여 아름다운 비단의 뜻을 빌어서 증산(繒山)이라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SUBW_ID":"2623","STTN":"합정","SBWY_ROUT_LN":"06호선","STTN_ORGN":"합정이라는 명칭은 옛날 양화나루근처의 마을로 그 일대를보통 양화도로 호칭한다. 조개우물로 불리워지는 우물이 있으므로 합정동의 이름이 생겼는데 후에 합정으로 불리워지고 있다."},{"SUBW_ID":"2738","STTN":"이수","SBWY_ROUT_LN":"07호선","STTN_ORGN":"총신대입구(이수)역은 이곳에 이수교가 있으므로 유래된 것이다. 이수교는 배물다리를 한자음으로 고친 것으로 이 다리 남쪽에 배나무골이 있고 동쪽에는 한강물이 흐르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SUBW_ID":"0236","STTN":"영등포구청","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역 인근에 영등포구청이 위치하고 있어 영등포구청역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영등포동의 명칭 유래는 확실치 않으나, 일반적으로 영등(靈登)굿과 관계되어 변형 표기된 영등(永登)과 물가를 뜻하는 포(浦)가 합쳐진 것으로 보고 있다."},{"SUBW_ID":"0318","STTN":"안국","SBWY_ROUT_LN":"03호선","STTN_ORGN":"안국동은 조선초부터 이 일대를 안국방(安國坊)으로 정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이곳은 전일에 북촌(北村), 또는 \"웃대\"로 불리던 \"서울 중의 서울\"이었다. 조선초 성종때 월산대군의 풍월정이 있었으며, 조선말 고종과 명성황후가 혼례식을 올린 안동별궁이 인근에 있었다."},{"SUBW_ID":"0331","STTN":"남부터미널","SBWY_ROUT_LN":"03호선","STTN_ORGN":"서초동에 위치한 화물터미널로 인해 화물터미널역으로 되어 있었으나 화물터미널이 이전하고 이전장소에 남부시외버스 터미널이 들어와 남부터미널역으로 개명하였다. 서초동에는 정곡과 왕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정씨와 왕씨가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SUBW_ID":"0432","STTN":"총신대입구","SBWY_ROUT_LN":"04호선","STTN_ORGN":"총신대입구(이수)역은 이곳에 이수교가 있으므로 유래된 것이다. 이수교는 배물다리를 한자음으로 고친 것으로 이 다리 남쪽에 배나무골이 있고 동쪽에는 한강물이 흐르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SUBW_ID":"2552","STTN":"명일","SBWY_ROUT_LN":"05호선","STTN_ORGN":"고려 성종 11년(994년)에 이곳에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의 숙박소로서 명일원을 두어 여행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해 주었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명일원, 원텃골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SUBW_ID":"2553","STTN":"고덕","SBWY_ROUT_LN":"05호선","STTN_ORGN":"고려말 형조참의 이양중이 태조의 조선건국을 반대하고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벼슬도 거절하는 등 굳은 절개를 지켜 주위로부터 덕이 높은 인물로 추앙 받아 고덕리 또는 고덕마을로 불려지게 되었다."},{"SUBW_ID":"2555","STTN":"둔촌동","SBWY_ROUT_LN":"05호선","STTN_ORGN":"광주 이씨의 시조인 묵은 이집이 신돈의 모함을 받고 지금의 일자산(둔촌동 뒷산) 서남쪽에 토굴을 파고 숨어 살았는데, 이때의 고난을 자손후세까지 잊지 않기 위하여 호를 둔촌으로 바꿨다. 현재의 둔촌동 동명은 이곳에서 은거생활을 한 이집의 호 둔촌에서 비롯되었고 서울시 지명위원회 심의를 거쳐 둔촌동역으로 이르게 되었다."},{"SUBW_ID":"0151","STTN":"시청","SBWY_ROUT_LN":"01호선","STTN_ORGN":"서울의 시청이 역 앞에 위치한데서 유래하였다. 시청역이 위치한 태평로는 1914년에 중국사신을 맞던 태평관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명(明)의 사신이 오면 이 길을 거쳐 태평관에서 경복궁으로 들어갔다."},{"SUBW_ID":"0235","STTN":"문래","SBWY_ROUT_LN":"02호선","STTN_ORGN":"문래동은 광복후 문익점의 목화 전래의 이름을 따서 문래동이라고 하였다는 해석이 있고 또 일설은 학교와 관공서등이 들어서 자글이 온다는 뜻에서 동명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SUBW_ID":"0237","STTN":"당산","SBWY_ROUT_LN":"02호선","STTN_ORGN":"당산동은 이마을 언덕에 당(堂)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마을 한가운데에 우뚝솟은 산이 있어 단산(單山)이라고 지칭하는데 이곳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어 이를 보호 하였고 또 동제당(洞祭當)이 있어 당산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SUBW_ID":"0238","STTN":"합정","SBWY_ROUT_LN":"02호선","STTN_ORGN":"합정이라는 명칭은 옛날 양화나루 근처의 마을로 그 일대를 보통 양화도라고 부른다. 조개우물로 불리는 우물이 있으므로 합정동의 이름이 생겼는데 후에 합정으로 불리고 있다."},{"SUBW_ID":"0320","STTN":"을지로3가","SBWY_ROUT_LN":"03호선","STTN_ORGN":"역이 있는 동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1945년 광복이 되면서 고구려의 명장인 을지문덕 장군의 성을 따서 을지로라 붙였으며, 을지로 3가에 위치하여 명명되었다. 조선왕조 때는 을지로 1~2가 사이에 나지막한 황토언덕이 있었는데, 비가 온 후 석양 무렵에는 황토흙이 구리빛이라 하여 이곳을  \"구리개\"로도 불리었으며, 1941년부터는 황금정(黃金町)으로 고쳐 부르기도 하였다."},{"SUBW_ID":"0321","STTN":"충무로","SBWY_ROUT_LN":"03호선","STTN_ORGN":"충무로는 임진왜란때 명장 충무공 이순신의 시호를 붙인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은 건천동 즉 현재의 인현동1가 였으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충무로로 지었다. 이곳은 남촌 또는 아랫대로 불리우던 지역으로 사육신의 힌사람인 박팽년 외에 많은 명사들이 살았다."},{"SUBW_ID":"2512","STTN":"개화산","SBWY_ROUT_LN":"05호선","STTN_ORGN":"新羅時代 駐龍先生이란 道人이 이 산에서 도를 닦다가 늙어 죽었다는데 선생이 죽은 후에 그 자리에는 이상한 꽃 한송이가 피어났다. 이를 두고 사람들이 개화산이라 일컬었다 한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전까지는 봉화불을 올렸다 하여 開火花山이라 하였는데 그 후에 개화산이라 명칭이 바뀌었다. 산의 모양이 꽃피는 형국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개화동의 면적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높이 132m의 개화산의 영향으로 유래됨\""},{"SUBW_ID":"2715","STTN":"노원","SBWY_ROUT_LN":"07호선","STTN_ORGN":"노원이란 명칭은 조선시대의 국립여관격인 원(院)터가 있었던 곳이라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하며, 서울 근교에서는 이와같은 홍제원, 이태원등이 있었다고 한다."},{"SUBW_ID":"2716","STTN":"중계","SBWY_ROUT_LN":"07호선","STTN_ORGN":"중계동은 한천의 중간에 위치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의 일부지역이었으며, 1881년 양주군 노원면 광명리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가 1914년 양주군 노원면과 해동천면을 합하여 노해면 중계1리로 명명되었고 지명을 역명으로 하여 중계역이라 하였다."},{"SUBW_ID":"2717","STTN":"하계","SBWY_ROUT_LN":"07호선","STTN_ORGN":"하계역은 하계동에 위치하고 있어서 명명된 이름이다.하계동을 이루는 자연부락들이 도봉구의 중앙을 흐르는 한내의 아랫쪽에 위치한다하여 동명이 붙여졌으며, 북쪽은 중계동과 접하고 서쪽은 한천을 경계로 월계동과 남쪽은 공릉동과 접하고 있다.한편 하계동에는 되룡골,윗골,오목다리,양지편 가재울 등 우리말 마을 이름이 옛부터 전해져 오고 있으며 지금도 그대로 불리고 있다."},{"SUBW_ID":"0203","STTN":"을지로3가","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역이 있는 동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1945년 광복이 되면서 고구려의 명장인 을지문덕 장군의 성을 따서 을지로라 붙였으며, 을지로 3가에 위치하여 명명되었다. 조선왕조 때는 을지로 1~2가 사이에 나지막한 황토언덕이 있었는데, 비가 온 후 석양 무렵에는 황토흙이 구리빛이라 하여 이곳을  \"구리개\"로도 불리었으며, 1941년부터는 황금정(黃金町)으로 고쳐 부르기도 하였다."},{"SUBW_ID":"0239","STTN":"홍대입구","SBWY_ROUT_LN":"02호선","STTN_ORGN":"동교동이란 동명은 세교라는 이름이 \"잔다리\"라고 하는데서 생겼으며 지형이 좀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있었기 때문에 \"윗잔다리\"라고 불렸고 당초 \"동교\"역으로 개통 예정이었으나, 인근에 홍익대학교가 위치하고 있어 \"홍대입구\"로 명명되었다."},{"SUBW_ID":"0240","STTN":"신촌","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신촌동의 명칭은처음 \"새터말\"이라고 부르던 곳인데 육전소례에 한성부 서부 용산방 신촌리 계가 나타났다. 이곳은 조선초기에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지를 찾을 때 모악을 주산으로 해서 이곳을 서울로 삼자는 주장과 신하들의 여론에 따라 몸소 신촌동 일대를 돌아보고 갔다."},{"SUBW_ID":"0429","STTN":"신용산","SBWY_ROUT_LN":"04호선","STTN_ORGN":"역이 있는 지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용산은 백제시대 한강에서 두 마리 용이 나타나 유래되었다는 설과 산줄기가 마치 용처럼 구불구불 뻗어 있어 불렸다는 설이 있다."},{"SUBW_ID":"0431","STTN":"동작","SBWY_ROUT_LN":"04호선","STTN_ORGN":"조선 왕조때 서울과 수원이남 지방을 잇던 동재기 나루 즉, 동작진에서 유래됨"},{"SUBW_ID":"2519","STTN":"까치산","SBWY_ROUT_LN":"05호선","STTN_ORGN":"봉제산(매봉산) 일대에는 예로부터 까치가 많이 서식하였으나, 화곡동 개발계획에 따라 봉제산 중턱까지 주택이 들어서고 인구가 급증하면서 까치들이 갈곳이 없어지자 비교적 늦게 개발된 이곳 까치산(해발 73.5m)으로 몰려들게 되어 까치산이란 산이름이 생겨나게 됨"},{"SUBW_ID":"2521","STTN":"목동","SBWY_ROUT_LN":"05호선","STTN_ORGN":"목동의 동명은 김포군 양동면 목동리에서 비롯되었으며 양천군 남산면의 작은 부락인 달기리, 엄지리, 남아리, 모새미, 마장안을 합쳐 외목동, 내목동, 월촌리가 되었으며 처음에는 牧洞(목동)이라 하였고 점차 표기가 달라져 木洞(목동)으로 불려졌다"},{"SUBW_ID":"2522","STTN":"오목교","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조선초 한강의 3대 나루터에 속했던 양화나루를 건너 경인지역으로 통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했던 안양천 위에 세워졌던 다리이며, 원래는 오목내라 불리던 지금의 안양천 위에 다리가  세워지면서 오목교(梧木橋)라 불리게 됨."},{"SUBW_ID":"2523","STTN":"양평","SBWY_ROUT_LN":"05호선","STTN_ORGN":"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설치되어 서민들의 한강도강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던 양화진 근처 벌판에 이루어진 마을이란 뜻에서 불리어진 것으로 楊花津의 楊자와 벌坪자를 따서 \"양평\"이라 명명됨"},{"SUBW_ID":"0155","STTN":"동대문","SBWY_ROUT_LN":"01호선","STTN_ORGN":"동대문역은 인근에 위치한 우리나라 보물 제1호인 동대문에서 유래하였다. 동대문은 흥인지문의 속칭으로 도성 4대문의 하나이다."},{"SUBW_ID":"0242","STTN":"아현","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아현동은 조선 고종 31년 갑오경장때부터 기록으로 전해오며 남쪽에 만리현과 서북쪽의대현이라는 두 큰 고개 중간을 잇는 이 고개가 작기때문에 \"애고개\" 즉 아현으로 부르던 것이 아(兒)가 아(阿)로 변하여 아현(阿峴)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SUBW_ID":"0243","STTN":"충정로","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충정로란 지명은순국열사 중 최초이며 대표적인 인물인 민충정공(閔忠正公)의 이름을 영원히기념하기 위해 붙여졌다.충정로는 1946년 10월 11일부터부르게 된 동명이다."},{"SUBW_ID":"0326","STTN":"압구정","SBWY_ROUT_LN":"03호선","STTN_ORGN":"압구정역은 조선조 세조,성종때 권신 한명회가 세상일을 잊기 위해 강가의 갈매기를 벗삼아 지내겠다는 정자 이름이다. 전일의 이곳은 돛단배 떠있는 \"동호\"와 강북의 원근 풍경 그리고 닥나무가 무성한 저자도 등이 펼쳐져 한 폭의 그림같은 절경이었다고 한다."},{"SUBW_ID":"0327","STTN":"신사","SBWY_ROUT_LN":"03호선","STTN_ORGN":"신사동은 1914년 새말(新村)과 사평리(沙平里)의 두 마을을 합칠때 각각 첫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곳은 광주군 언주면에 속해 있을 당시에는 모래 벌판에 \"새말\" 나루터가 있던 한적한 곳이었으나 1963년에 서울시에 편입된 후 크게 변했다."},{"SUBW_ID":"2529","STTN":"마포","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우리말 삼개로 불리어지는 포구 이름 마포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삼(麻)개(浦)의 한자음에서 따옴"},{"SUBW_ID":"2535","STTN":"종로3가","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역이 있는 종로구의 동명과 가로명에서 유래하였다. 종로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밤에는 인정(人定),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개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鐘樓)가 있어 유래된 것이다. 이 거리에는 조선 초부터 시전이 있었던 번화가이어서 일명 운종가로 칭해졌던 서울의 상업 중심가였다."},{"SUBW_ID":"2537","STTN":"동대문역사문화공원","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인근에 동대문운동장이 있어 명명되었다가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되어 2009년 12월 1일자로 역명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변경되었다. 동대문운동장은 1926년에 육상경기장과 야구장, 정구장이 완공되어 경성운동장으로 불리었으나, 해방 후에는 서울운동장, 동대문운동장으로 불리우다 철거되었다. 원래 육상경기장은 조선 500여년간 장병의 선발과 무술훈련을 하던 훈련원터였다."},{"SUBW_ID":"2538","STTN":"청구","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청구란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지칭하던 말로 지역주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지하철 역명을 제정"},{"SUBW_ID":"2540","STTN":"행당","SBWY_ROUT_LN":"05호선","STTN_ORGN":"행당동 동명은 갑오개혁(1894)부터 행당리동으로 칭하여 내려온 것으로, 행당초등학교 동쪽산 일대에 살구나무와 은행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행당이라는 동명이 생겼다고 한다."},{"SUBW_ID":"0241","STTN":"이대","SBWY_ROUT_LN":"02호선","STTN_ORGN":"대흥동은 독은 구워파는 것을 업으로 삼는곳이라는 의미에서 독막 또는 독마을로 불리워 지던지방이었다. 1936년 4월 경성부의 지역을 확대하면서 대흥정으로 되니 이것이 대흥 이라는동명의 시초가 되었다. 인근에 이화여자대학교가 있어 이대역으로 명명되었다."},{"SUBW_ID":"0244","STTN":"용답","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용답동의 동명은 용두동지역과 답십리동지역의 일대가 1975년 10월 1일 통합되면서 머리 글자를 따서 용답동이 되었으며 인근에 군자차량기지가 있어 기지역으로 명명되었다가 용답역으로 개명되었다."},{"SUBW_ID":"0245","STTN":"신답","SBWY_ROUT_LN":"02호선","STTN_ORGN":"1) 신설동과 답십리동의 중간 즈음에 있다고 하여 신답역으로 이름지어진 것으로 추정.\n<br/>2) 답십리동 속의 자연촌락으로 원말, 새말 등이 있었으며 새말에서 신답이란 지명이 유래된것으로 추정\n<br/><br/><br/><br/><br/><br/>"},{"SUBW_ID":"0246","STTN":"신설동","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역이 위치한 동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신설동은 조선 중기 동부 숭신방에 새로 설치된 마을로 신설계라 한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SUBW_ID":"0247","STTN":"도림천","SBWY_ROUT_LN":"02호선","STTN_ORGN":"도림천은 당시 이곳 지명이었던 도림리를 흐르는 하천이란 뜻으로 도림천이라 불리게 되었고 역이 들어서면서 도림천역이라 명명되었다."},{"SUBW_ID":"0328","STTN":"잠원","SBWY_ROUT_LN":"03호선","STTN_ORGN":"잠원동은 조선초 잠실을 이곳에 두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며, 원래 이곳은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였는데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될때 강동구 잠실동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잠원동 이라한 것이다. 잠실은 잠실도회의 준말로서 조선초의 국립 양잠소였다."},{"SUBW_ID":"0340","STTN":"가락시장","SBWY_ROUT_LN":"03호선","STTN_ORGN":"가락동은 조선시대 가락골을 중심으로 띄엄띄엄 마을이 있어 자연부락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을축년(1925년) 대홍수때 한강이 범람하여 송파동 일대가 침수되자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가히 살 만한 땅\" 즉, 좋은 땅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농수산물 종합도매시장이 1985.6.1 개장되어 서울시민에게 신선한 야채와 과일, 어물, 축산물을 공급하고 있다"},{"SUBW_ID":"0412","STTN":"창동","SBWY_ROUT_LN":"04호선","STTN_ORGN":"나라의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인 조선시대 후기 어영청의 북창이 이곳에 있었기에 유래했다."},{"SUBW_ID":"0416","STTN":"미아사거리","SBWY_ROUT_LN":"04호선","STTN_ORGN":"본래 종암동, 장위동, 돈암동이 갈라지는 미아삼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1985년 4월 20일 지하철 개통 때 미사삼거리역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길음동방면에서 수유방면으로 넘어가는 고가도로가 철거돼 사거리로 변경됨에 따라 주민들과 이용객들의 불편과 혼을 덜어 주기 위하여 2013년 12월 26일 역명을 미아사거리역으로 변경하였다."},{"SUBW_ID":"2557","STTN":"방이","SBWY_ROUT_LN":"05호선","STTN_ORGN":"마을의 지형이 아늑하고 개나리꽃이 많이 핀다고 하여 방잇골로 불리다가 한자음인 방이동이라 고쳐진 것이다."},{"SUBW_ID":"2644","STTN":"돌곶이","SBWY_ROUT_LN":"06호선","STTN_ORGN":"마을 동쪽에 있는 천장산의 한맥이 검정돌을 꽂아 놓은 즉, 수수팥떡이 경단을 꼬지에 꿰어 놓은 것 같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돌곶이 마을이라 부른데서 유래하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석관동(石串洞)이라 함."},{"SUBW_ID":"2645","STTN":"석계","SBWY_ROUT_LN":"06호선","STTN_ORGN":"석계역은 석관동(石串洞)과 월계동(月溪洞)의 경계지역에 위치하여 석관동의 첫 글자인 석(石)자와 월계동의 두 번째 글자인 계(溪)자를 조합하여 제정"},{"SUBW_ID":"0248","STTN":"양천구청","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양천 옛지명은 제차파의(구멍바위)로 서부한강변 가양동에 있는 암굴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려 충선왕2년에 비로서 양천(陽川)이라는 지명이 명명되어 작은 암초의 땅이름에서 보다 넓은 뜻을 가진 땅이름으로 전환되었다."},{"SUBW_ID":"0417","STTN":"길음","SBWY_ROUT_LN":"04호선","STTN_ORGN":"길음(吉音)이라는 지명은 일명 기레미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말은 본래 이 지역을 통과하는 정릉천이 흐르는 계곡마다 그 물소리가 맑고 고와서 좋은 노래소리가 들리는 동네라는 뜻으로 지금은 그 음을 따서 길음동으로 불려지고 있다."},{"SUBW_ID":"0419","STTN":"한성대입구","SBWY_ROUT_LN":"04호선","STTN_ORGN":"삼선교(三仙橋)라는 지명은 이 지역 남쪽의 옥녀봉 봉우리에 하늘에서 내려온 세 선녀와 옥녀가 함께 어울려 놀았다는 전설이 오늘에까지 전래되고 있는데서 유래된 것이다."},{"SUBW_ID":"0420","STTN":"혜화","SBWY_ROUT_LN":"04호선","STTN_ORGN":"혜화라는 지명은 근세 조선의 도성8대문중의 하나로서 혜화문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혜화문이 위치했던 숲의 무성한 고개를 \"동소문고개\"라 했다 해서 동소문으로 불리어 졌었다고 한다."},{"SUBW_ID":"0422","STTN":"동대문역사문화공원","SBWY_ROUT_LN":"04호선","STTN_ORGN":"인근에 동대문운동장이 있어 명명되었다가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되어 2009년 12월 1일자로 역명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변경되었다. 동대문운동장은 1926년에 육상경기장과 야구장, 정구장이 완공되어 경성운동장으로 불리었으나, 해방 후에는 서울운동장, 동대문운동장으로 불리우다 철거되었다. 원래 육상경기장은 조선 500여년간 장병의 선발과 무술훈련을 하던 훈련원터였다."},{"SUBW_ID":"0423","STTN":"충무로","SBWY_ROUT_LN":"04호선","STTN_ORGN":"충무로는 임진왜란때 명장 충무공 이순신의 시호를 붙인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은 건천동 즉 현재의 인현동1가 였으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충무로로 지었다. 이곳은 남촌 또는 아랫대로 불리우던 지역으로 사육신의 힌사람인 박팽년 외에 많은 명사들이 살았다."},{"SUBW_ID":"0424","STTN":"명동","SBWY_ROUT_LN":"04호선","STTN_ORGN":"명동은 갑오개혁(1894년)때 처음 붙여진 이름으로 이는 조선초부터 이곳을 명례방이라고 한데서 유래된 것이다. 유행의 1번지로 일컫는 이곳은 한때 다방을 중심으로 \"예술의 거리\"로 알려져 있다."},{"SUBW_ID":"0425","STTN":"회현","SBWY_ROUT_LN":"04호선","STTN_ORGN":"회현동은 조선말 고종때 처음 붙여진 이름으로 이는 전일의 호현동(好賢洞)이 반음되어 유래된 것으로 이곳에는 조선왕조때 정광필, 김상헌 형제등의 어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회현동(會賢洞)이라 불리어진 것이다."},{"SUBW_ID":"2739","STTN":"남성","SBWY_ROUT_LN":"07호선","STTN_ORGN":"남성동은 신동출장소에 딸린 한동으로 사당동과 방배동 일원을 관할하던 행정관청이었음. 남성동의 유래는 효성이 지극한 정조대왕이 수원에 있는 사도세자 능행시 행차길인 현재의 사당동 일대가 예전에 여시고개, 살피재 등으로 불려짐에 따라 임금의 행차길로는 이물스러운 지명이라 신하들이 여시고개를 남쪽에 큰 재라는 의미의 남태령이라 불렀으며 재의 안쪽인 이곳이 마치 성과같다하여 재성자를 따서 남성이라 일컬어짐"},{"SUBW_ID":"2740","STTN":"숭실대입구","SBWY_ROUT_LN":"07호선","STTN_ORGN":"살피재 고개는 상도동과 봉천동 고개로서, 옛날 이곳은 수목이 울창하여 도둑이 많이 출몰하였던지라 이 재를 넘기 전에 사람들이 살펴서 가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짐"},{"SUBW_ID":"0206","STTN":"신당","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신당동은 조선시대 신당리계(新堂里契)에서 비롯된 동명으로 신당(新堂)을 모신 동네라는 뜻을가지고 있다. 신당이란 무당들이 받들어 모시는 신령을 모신집을 말한다. 이 일대에는 신당을 중심으로 많은 무당들이 광희문 밖에 살았다고 한다."},{"SUBW_ID":"0249","STTN":"신정네거리","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신정네거리에 역이 위치하여 이름이 명명되었으며, 신정이란 이름은 신기(新機:신트리)의 \"신\"(新)자와 은행정의 \"정\"(亭)자를 따서 신정리라 한데서 비롯되었다."},{"SUBW_ID":"0250","STTN":"용두","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역이 위치한 동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용두동은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모습이 용(龍)의 머리(頭)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SUBW_ID":"0309","STTN":"지축","SBWY_ROUT_LN":"03호선","STTN_ORGN":"역이 있는 동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조선시대에 종이를 만들던 마을인 지정리와 싸리나무가 많이 자생하던 마을인 축리로 되어 있다가 해방 후 고양군으로 편입되면서 지정리의 \"지\"와 축리의 \"축\"을 합쳐 지축리로 되었다."},{"SUBW_ID":"0310","STTN":"구파발","SBWY_ROUT_LN":"03호선","STTN_ORGN":"구파발이란 지명은 조선중기부터 공문서를 전달하기 위한 파발역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지역은 옛부터 경의가도의 덕수원이란 국립여관외에 주막과 대장간이 많았다."},{"SUBW_ID":"0311","STTN":"연신내","SBWY_ROUT_LN":"03호선","STTN_ORGN":"역이 있는 동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연신내라는 말은 연(延) 시내(川) 즉 연천(연서천)의 우리말 풀이가 변한 것으로 전하여지고, 일설에 의하면 조선조 인조반정 당시 능양군(인조)이 신하를 늦게 만난 개천이라 하여 연신내(延臣川)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SUBW_ID":"0312","STTN":"불광","SBWY_ROUT_LN":"03호선","STTN_ORGN":"불광동이란 지명은 이 근처에 바위와 절이 많았는데 그중 부처의 서광이 어린 불광사가 위치함으로 유래되었으며 이곳은 조선왕조때 한성부 관할구역으로 수리봉 산밑에는 산돼지가 많이 내려와 농작물에 피해를 입은 저서현이라는 고개도 있다."},{"SUBW_ID":"0426","STTN":"서울역","SBWY_ROUT_LN":"04호선","STTN_ORGN":"우리나라 서울의 중앙역인 서울역이 인근에 위치한데서 유래하였다. 1900년 남대문역으로 출발한 서울역은 우리나라 철도의 대표적인 역으로 주요 철도의 시발점이자 종착역이다.  1923년 경성역으로 개칭되었으나 광복 후에 서울역으로 불려지게 되었다."},{"SUBW_ID":"0205","STTN":"동대문역사문화공원","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인근에 동대문운동장이 있어 명명되었다가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되어 2009년 12월 1일자로 역명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변경되었다. 동대문운동장은 1926년에 육상경기장과 야구장, 정구장이 완공되어 경성운동장으로 불리었으나, 해방 후에는 서울운동장, 동대문운동장으로 불리우다 철거되었다. 원래 육상경기장은 조선 500여년간 장병의 선발과 무술훈련을 하던 훈련원터였다."},{"SUBW_ID":"0209","STTN":"한양대","SBWY_ROUT_LN":"02호선","STTN_ORGN":"행당동의 동명은 갑오개혁(1894년)때부터 불러오고 있으며 현재의 행당국민학교 동쪽산 일대에 살구나무,은행나무가 많이심어져 있어서 행당이라는 동명이생겼다고 한다. 인근에 한양대학교가 있어 한양대로 명명하였다."},{"SUBW_ID":"0210","STTN":"뚝섬","SBWY_ROUT_LN":"02호선","STTN_ORGN":"한강으로 들어가는 중랑천 하류에 있는 뚝섬은 삼면에 물이 있어 섬이라 부를만 하다하여 한성부때 독도(纛島), 살꽃이벌으로 불려오다 뚝섬으로 불리어졌다. 독도(纛島)는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 때부터 임금의 사냥장소였다는 데서 나왔다. 임금이 행차하면 그 상징으로 독기(纛旗:소꼬리나 꿩꽁지로 장식한 큰 깃발)를 꽂았는데, 이곳이 한강과 중랑천으로 둘러싸인 섬 같다고 해서 ‘독기를 꽂은 섬’이란 뜻에서 \"독도(纛島)\"라 불리었다."},{"SUBW_ID":"0211","STTN":"성수","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전래에 의하면 성수라는 이름은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마을사람들이 그 물을 마실 수가 있었으며 이곳에 성덕정이라는 큰 정자가 있었는데 이곳 정자에서 선비들이 흐르는 물을 마시며 풍류를 읊으며 노닐었다는 성스러운 물 즉聖水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SUBW_ID":"0212","STTN":"건대입구","SBWY_ROUT_LN":"02호선","STTN_ORGN":"행정구역상 광진구 화양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세종 14년 화양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지면서 일대가 화양리로 불리워졌으며 지금은 예 정자는 없어지고 서울지방 기념품 2호로 지정된 높이 28m의 650년 된 느티나무가 있어 옛 정취를 대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화양역으로 명명하는 것이 옳으나 역과 인접한 건국대학교의 시민인지도가 높아 건대입구역으로 역명을 정하였다고 함."},{"SUBW_ID":"0316","STTN":"독립문","SBWY_ROUT_LN":"03호선","STTN_ORGN":"독립문역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이 세워져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문은 1897년 서재필 박사의 노력으로 영은문 대신 세운것으로 현재 사적 3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곳을 영천이라 부르게 된것은 악박골 약수가 유명했기 때문에 유래된것이다."},{"SUBW_ID":"2515","STTN":"마곡","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옛날에 이 동네에 삼(麻)을 많이 심어서 붙여진 이름이다."},{"SUBW_ID":"0207","STTN":"상왕십리","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상왕십리동명의 유래는 조선초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도읍을 정하려고 이곳까지 와서 도선대사의 변신인 늙은 농부로부터 십리를 더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왕십리라 전해오고 있다. 왕십리 윗쪽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상왕십리로 칭한 것이다."},{"SUBW_ID":"0208","STTN":"왕십리","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왕십리 동명의 유래는 조선 초 국사였던 무학대사가 도읍지터를 물색하던 중 지금의 왕십리 지역에서 만난 도선대사의 변신인 한 늙은 농부로부터 서북쪽으로 십리를 더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왕십리(往十里)라 전해오고 있다."},{"SUBW_ID":"0154","STTN":"종로5가","SBWY_ROUT_LN":"01호선","STTN_ORGN":"역이 있는 종로구의 동명과 가로명에서 유래하였다. 종로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밤에는 인정(人定),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개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鐘樓)가 있어 유래된 것이다. 이 거리에는 조선 초부터 시전이 있었던 번화가이어서 일명 운종가로 칭해졌던 서울의 상업 중심가였다."},{"SUBW_ID":"0156","STTN":"신설동","SBWY_ROUT_LN":"01호선","STTN_ORGN":"역이 위치한 동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신설동은 조선 중기 동부 숭신방에 새로 설치된 마을로 신설계라 한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SUBW_ID":"0157","STTN":"제기동","SBWY_ROUT_LN":"01호선","STTN_ORGN":"제기동이란 이름은 \"제사를 지내는 자리\"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그 제사를 올리던 터가 바로 선동단이다. 동단은 조선왕조가 개국하면서 농본정책을 펴 일찍이 농사짓는 법을 가르친 제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설치한 제단이다. 그 해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경칩이 지난 뒤 길한 날을 가려 왕이 친림하여 제사를 지내고,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SUBW_ID":"0159","STTN":"동묘앞","SBWY_ROUT_LN":"01호선","STTN_ORGN":"동묘는 중국 촉한의 명장 관우의 사당(보물 제142호)으로 원래 명칭은 동관왕묘이다. 임진왜란때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성스러운 관우장군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 여겨서 명나라 왕이 직접 액자를 써서 보내와 선조때(1601년) 창건하였으며, 그 후 영조15년(1736년)에 중수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SUBW_ID":"0200","STTN":"까치산","SBWY_ROUT_LN":"02호선","STTN_ORGN":"봉제산(매봉산) 일대에는 예로부터 까치가 많이 서식하였으나, 화곡동 개발계획에 따라 봉제산 중턱까지 주택이 들어서고 인구가 급증하면서 까치들이 갈곳이 없어지자 비교적 늦게 개발된 이곳 까치산(해발 73.5m)으로 몰려들게 되어 까치산이란 산이름이 생겨나게 됨"},{"SUBW_ID":"0201","STTN":"시청","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서울의 시청이 역 앞에 위치한데서 유래하였다. 시청역이 위치한 태평로는 1914년에 중국사신을 맞던 태평관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명(明)의 사신이 오면 이 길을 거쳐 태평관에서 경복궁으로 들어갔다."},{"SUBW_ID":"2712","STTN":"도봉산","SBWY_ROUT_LN":"07호선","STTN_ORGN":"도봉산역은 서울근교의 명산인 도봉산 아래에 위치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일제가 1914년 4월 우리나라의 부, 군, 면을 폐합할 당시 도봉산 아래의 다락원, 서말원, 무수원 등 마을을 합하면서부터 도봉 이라는 명칭이 쓰이기 시작했다."},{"SUBW_ID":"0152","STTN":"종각","SBWY_ROUT_LN":"01호선","STTN_ORGN":"역 앞에 보신각(종각)이 있어 역의 이름이 되었다. 종각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밤에는 인정(人定),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鐘樓)가 있었는데 보신각이라는 편액을 달면서 보신각으로 유래하였고, 현재는 종각으로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3.1절, 광복절, 새해를 알리는 제야의 종을 쳐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종으로 사랑받게 되었다."},{"SUBW_ID":"0153","STTN":"종로3가","SBWY_ROUT_LN":"01호선","STTN_ORGN":"역이 있는 종로구의 동명과 가로명에서 유래하였다. 종로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밤에는 인정(人定),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개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鐘樓)가 있어 유래된 것이다. 이 거리에는 조선 초부터 시전이 있었던 번화가이어서 일명 운종가로 칭해졌던 서울의 상업 중심가였다."},{"SUBW_ID":"0158","STTN":"청량리","SBWY_ROUT_LN":"01호선","STTN_ORGN":"역이 위치한 동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청량이라는 이름은 청량 1동 61번지에 있는 사찰 청량사에서 유래하였다. 옛날 청량사가 있던 바리산은 수목이 울창하고 샘이 맑았는데, 남서쪽이 트여 있고 늘 시원하고 청량한 바람이 불었다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SUBW_ID":"0202","STTN":"을지로입구","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을지로입구역은 우리나라의 위인중의 한사람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성을 따서 붙인 것이다. 조선왕조때는 구리개로 불리우던 이길은 1941년부터 황금정으로 고친적도 있다. 이곳은 을지로의 입구에 위치하였기에 을지로입구로 명명되었다."},{"SUBW_ID":"0204","STTN":"을지로4가","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을지로4가역은 우리나라 위인중의 한사람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성을 따서 붙인것이다.조선왕조때는 구리개로 불리던 이길은 1914년부터 황금정(黃金町)으로고친적 도 있다. 이곳은 을지로의 중심부인4가에 위치하기에 을지로 4가역으로 명명되었다."},{"SUBW_ID":"0213","STTN":"구의","SBWY_ROUT_LN":"02호선","STTN_ORGN":"구의동의 동명은 1914년 4월1일 경기도 양주군의 아홉개의 우물이 있다고 해서 구정동이라 불리던 구정동과 산의동이 경기도 고양군으로 편입되면서\"구\"자와 \"의\"자를 따서 구의동이 된 것이다."},{"SUBW_ID":"0214","STTN":"강변","SBWY_ROUT_LN":"02호선","STTN_ORGN":"강변역은 한강제방 축조시조성된 공한지 위에 세워진 역사로써 삼환기업(주)이 1978년 3월9일에 착공하여 2년 7개월 22일에걸친 공사끝에 1980년 10월 31일을 기하여 영업개시하게 되었으며 한강변에 위치한다하여 \"강변역\"으로 명명하게 되었다."},{"SUBW_ID":"0217","STTN":"잠실새내","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잠실새내역은 신천역의 새로운 역명으로 신천의 고유어인 새내를 활용하여 이름지어 졌으며 송파구 잠실동에 위치하고 있다."},{"SUBW_ID":"0218","STTN":"종합운동장","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종합운동장역은 인근에 주경기장과실내체육관, 야구장, 수영장, 학생체육관등이 있어 종합운동장역으로 명명되었다. 행정구역으로는 송파구 잠실1동에 위치하고 있다."},{"SUBW_ID":"0219","STTN":"삼성","SBWY_ROUT_LN":"02호선","STTN_ORGN":"삼성동은 신라성왕 10년(794년)에 창건된 사찰인 봉은사, 삼성동동쪽 한강 가운데 있는 섬으로 남쪽에 어린아이와 같이 생긴 바위와무릉도,당나무를 파는 상점이 많은 닥점의 세마을이 합하여져 지어진 명칭이다."},{"SUBW_ID":"2633","STTN":"버티고개","SBWY_ROUT_LN":"06호선","STTN_ORGN":"한남동에서 약수동으로 넘어가는 다산로(茶山路)고개를 버티고개라고 하는데 옛날 순라군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라 하며, 도둑을 쫓았으므로 번티(番峙)라 하다가 변하여 버티고개 또는 한자명으로 부어치(夫於峙)가 되었다고 한다."},{"SUBW_ID":"2640","STTN":"안암","SBWY_ROUT_LN":"06호선","STTN_ORGN":"안암동 3가에 있는 대광아파트 단지 가운데에 장정 20여명이 앉아 편히 쉴만한 바위가 있어 그 바위 이름을 \"앉을바위\"라 하였으며, 그것을 한자로 안암(安岩)으로 옮겨 쓴 것에서 유래됨"},{"SUBW_ID":"2727","STTN":"군자","SBWY_ROUT_LN":"07호선","STTN_ORGN":"옛날 어느 왕의 일행이 거동하다가 마침 이곳 남일 농장터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날 밤 동행하던 왕비가 옥동자를 낳았으므로 이곳을 군자동이라 하였다고 전하며 지금도 이곳을 명려궁터라고 부르기도 한다."},{"SUBW_ID":"0234","STTN":"신도림","SBWY_ROUT_LN":"02호선","STTN_ORGN":"도림동은 산형국이 마을뒤로 성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이 마을이 국도에서 돌아 앉아있다고 해서 \"도야미리\"가 \"도림\"으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SUBW_ID":"0325","STTN":"옥수","SBWY_ROUT_LN":"03호선","STTN_ORGN":"옥수동은 이곳에 \"옥정수\"라는 우물이 유명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바위틈에서 나온 이 우물은 그맛이 뛰어나 왕에게 바치기도 했는데 1960년 도로공사때 매몰되었다."},{"SUBW_ID":"2514","STTN":"송정","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소나무가 많이 심어져 울창했고 이곳에 누가 지었는지 모르는 소나무로 된 정자가 있으므로 그 정자 이름을 송정이라 하고 일대를 송정리라 부른데서 유래."},{"SUBW_ID":"2517","STTN":"우장산","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우장산은 내발산동과 화곡 제5동에 걸쳐 있는 높이 98m의 산으로 옛날에는 기우제를 지냈던 산으로도 유명하다.  우장산이란 이름은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즉시 비가 내리므로 반드시 우장을 준비하여 기우제에 임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SUBW_ID":"2638","STTN":"창신","SBWY_ROUT_LN":"06호선","STTN_ORGN":"창신동은 조선초(태조5년 1396년)부터 있었던 한성부의 5부52방가운데 동부의 仁昌坊과 崇信坊의 글자를 따서 1914년부터 \"창신동\"이라 하였고, 1943년 구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경서부 동부출장소 관할에서 동대문구로 편입되었다가 1975년10월에 동대문구에서 종로구로 편입되어 현대에 이르고 있음"},{"SUBW_ID":"2639","STTN":"보문","SBWY_ROUT_LN":"06호선","STTN_ORGN":"보문동 3가 168번지에 있는 보문사(普門寺)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보문동은 1948년 8월 대통령령 제159호로 동대문구에서 성북구를 분리할 때 신설동의 일부지역을 편입하여 설치된 것으로 당시 관내에 있는 보문사의 이름을 따서 그 명칭을 제정한 것이다."},{"SUBW_ID":"0332","STTN":"양재","SBWY_ROUT_LN":"03호선","STTN_ORGN":"양재라는 지명은 조선시대부터 교통, 우체국역할을 하던 양재역이 이곳에 설치되어 있어 유래된 것이다."},{"SUBW_ID":"0427","STTN":"숙대입구","SBWY_ROUT_LN":"04호선","STTN_ORGN":"숙대입구역이 위치한 갈월동은 갑오개혁때 붙여진 명칭으로 칡이 무성하여 유래된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곳은 산줄기가 불룩하게 나와 있어 \"부룩배기\"라고도 불린다."},{"SUBW_ID":"0430","STTN":"이촌","SBWY_ROUT_LN":"04호선","STTN_ORGN":"이촌동은 옛날부터 중지도와 상변에 살던 사람들이 큰 비만 오면 대피했기 때문에 이촌동 으로 되었다고 한다. 또한 1914년에 신촌리, 사촌리의 두 마을을 합쳤기 때문에 이촌동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SUBW_ID":"2541","STTN":"왕십리","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왕십리 동명의 유래는 조선 초 국사였던 무학대사가 도읍지터를 물색하던 중 지금의 왕십리 지역에서 만난 도선대사의 변신인 한 늙은 농부로부터 서북쪽으로 십리를 더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왕십리(往十里)라 전해오고 있다."},{"SUBW_ID":"2543","STTN":"답십리","SBWY_ROUT_LN":"05호선","STTN_ORGN":"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정하려고 이 곳을 밟았다 하여 답십리라 했다는 구전이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동대문에서 걸어서 십리에 위치한 곳이라 유래됨"},{"SUBW_ID":"2641","STTN":"고려대","SBWY_ROUT_LN":"06호선","STTN_ORGN":"고려대 부지(생활관 지하)에 역사가 위치하여 고려대역으로 역명을 정했으며 또한 종암역이라고도 하는데 고려대 뒷산에 종(鐘)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한자로 종암(鐘岩)이라고 부른데서 유래 됨."},{"SUBW_ID":"2643","STTN":"상월곡","SBWY_ROUT_LN":"06호선","STTN_ORGN":"상월곡(한국과학기술연구원)역(上月谷(韓國科學技術硏究院)驛)은 지하철 6호선 역 이름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 157(상월곡동 26-1)에 위치한다.\n<br/> 역명은 천장산의 형세가 마치 반달과 같다고 하여 그 산에 접해있는 마을을 \"다릿굴(골)\"이라 부르는데서 유래하였다. \n<br/> 이 중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지역을 \"웃다릿골(上月谷里), 아래 지역을 아랫다릿골(下月谷里)\"이라 불렀는데, 1894년 갑오개혁 때 월곡상리로 명명한 이후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상월곡리가 되었다.  \n<br/> 위 지역을 상월곡동이라 한 마을 이름을 지하철 개통 때 역 이름으로 붙였으며, 인근에 한국과학기술원이 있어 1996년 3월 26일 병기하였다.\n<br/> 역 주변에 월곡중학교, 월곡초등학교, 석관동우체국, 성북구립정보도서관, 성북구도시관리공단,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등이 있다."},{"SUBW_ID":"2729","STTN":"건대입구","SBWY_ROUT_LN":"07호선","STTN_ORGN":"행정구역상 광진구 화양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세종 14년 화양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지면서 일대가 화양리로 불리워졌으며 지금은 옛 정자는 없어지고 서울지방 기념품 2호로 지정된 높이 28m의 650년 된 느티나무가 있어 옛 정취를 대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화양역으로 명명하는 것이 옳으나 역과 인접한 건국대학교의 시민인지도가 높아 건대입구역으로 역명을 정하였다고 함."},{"SUBW_ID":"2730","STTN":"자양","SBWY_ROUT_LN":"07호선","STTN_ORGN":"조선시대에 나라에서 말 1,000마리를 기르면 용마(龍馬)가 난다하여 자마(雌馬) 즉, 암말을 길렀기 때문에 자마장이라 칭하였고, 동명을 자마장이라 부르다가 전음(轉音)되어 자양동으로 지칭"},{"SUBW_ID":"0322","STTN":"동대입구","SBWY_ROUT_LN":"03호선","STTN_ORGN":"동대입구역이 위치한 장충동(奬忠洞)은 광무 4년(1900) 을미사변때 순국한 사람들을 위하여 단을 꾸며놓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곳에 설치된 장춘단은 일제가 폐지하고 공원을 조성하였다."},{"SUBW_ID":"0323","STTN":"약수","SBWY_ROUT_LN":"03호선","STTN_ORGN":"약수역은 1970년까지 약수동이란 행정구역 명칭이 있었으므로 유래된 것이다. 약수동은 신당 3동 지역에 위장병에 특효가 있는 약수가 있어서 유래된 것이다. 전에는 이곳에서 한남동 으로 가려면 높은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이 고개 이름을 버티고개라 칭했다."},{"SUBW_ID":"0411","STTN":"노원","SBWY_ROUT_LN":"04호선","STTN_ORGN":"노원이란 명칭은 조선시대의 국립여관격인 원(院)터가 있었던 곳이라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하며, 서울 근교에서는 이와같은 홍제원, 이태원등이 있었다고 한다."},{"SUBW_ID":"0413","STTN":"쌍문","SBWY_ROUT_LN":"04호선","STTN_ORGN":"쌍문이란 지명유래는 쌍갈래길에 이문이란 일종의 방범초소가 있어 \"쌍갈무늬\"라고 불리던 것이 변음된 것이라고 한다."},{"SUBW_ID":"0414","STTN":"수유","SBWY_ROUT_LN":"04호선","STTN_ORGN":"수유리라는 지명은 인근의 우이천이 장마철이되면 흔히 물이 넘쳐 물결치는 모습이 아름답다 하여 수유라고 불려졌다고 한다."},{"SUBW_ID":"0415","STTN":"미아","SBWY_ROUT_LN":"04호선","STTN_ORGN":"\"미아\"라는 지명은 고려말기부터 부근 야산의 언덕에 있던 마을의 모습을 넓을 미(彌)와 언덕을 뜻하는 아(阿)를 합하여 부르던 것으로 원래는 삼각산 끝의 양지바른 곳이라 하여 삼양동으로 불리기도 하였다."},{"SUBW_ID":"0421","STTN":"동대문","SBWY_ROUT_LN":"04호선","STTN_ORGN":"동대문역은 인근에 위치한 우리나라 보물 제1호인 동대문에서 유래하였다. 동대문은 흥인지문의 속칭으로 도성 4대문의 하나이다."},{"SUBW_ID":"2718","STTN":"공릉","SBWY_ROUT_LN":"07호선","STTN_ORGN":"1963.1.1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서 서울시로 편입될 당시 서쪽에 공덕리, 동쪽에 태릉, 강릉이 있었는데 주민들의 합의에 의하여 공덕리의 孔자와 태릉의 陵자를 따서 공릉동이라는 지명으로 사용하기로 하였다고 한다."},{"SUBW_ID":"2719","STTN":"태릉입구","SBWY_ROUT_LN":"07호선","STTN_ORGN":"태릉은 불암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사적 201호로 조선 11대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임( 그 북쪽에는 조선 명종과 원순왕후의 능침인 태강릉이 있음)"},{"SUBW_ID":"2720","STTN":"먹골","SBWY_ROUT_LN":"07호선","STTN_ORGN":"먹골은 조선시대 먹을 제조하여 붙여진 묵동이라는 이름을 순수한 우리말로 표기한 것이라고도 하며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인 먹을 이 마을의 이름으로 붙여야 학문이 발달할 것이라는 필기설에 따라 정해졌다는 설이 있다."},{"SUBW_ID":"0319","STTN":"종로3가","SBWY_ROUT_LN":"03호선","STTN_ORGN":"역이 있는 종로구의 동명과 가로명에서 유래하였다. 종로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밤에는 인정(人定),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개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鐘樓)가 있어 유래된 것이다. 이 거리에는 조선 초부터 시전이 있었던 번화가이어서 일명 운종가로 칭해졌던 서울의 상업 중심가였다."},{"SUBW_ID":"2544","STTN":"장한평","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신라시대에 장한성(長漢城)이 축조되어 인근지역이 장한벌 또는 장한평으로 불렸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장안평으로 잘못 불려져 왔던 것을 삼국시대부터 불리워진 이 지역의 옛 지명으로 다시 찾은 것임"},{"SUBW_ID":"2546","STTN":"아차산","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아차산역명은 광진구 일대에 위치한 아차산 지명에서 유래하였으며 역사적 흔적으로는 사적 제234호로 지정된 아차산성이 있다. 이성은 삼국시대 한강유역의 군사 요충지로서 고구려 평강왕의 사위인 온달장군이 신라군과 싸우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SUBW_ID":"2547","STTN":"광나루","SBWY_ROUT_LN":"05호선","STTN_ORGN":"광장동의 동명은 원래 조선시대에 양주군 고양주민의 광진리 (일명 광나루)와 장의동이 통합되어 광진리의 \"\"광\"\"자를 따서  광장동이 된 것이며, 광나루는 강폭이 넓은 나루가 있다하여 얻어진 이름이다."},{"SUBW_ID":"2549","STTN":"강동","SBWY_ROUT_LN":"05호선","STTN_ORGN":"태양이 가장 먼저 뜨는 동쪽 마을, 수도 서울의 젖줄인 한강의 상류 동쪽에 위치한 강동구에서 유래된 강동역, 1979년 10월 강남구가 분구되면서 강동구가 신설되었다."},{"SUBW_ID":"2551","STTN":"굽은다리","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조선시대 이 지역은 당말,벽동등의 자연마을을 잇는 다리가 굽어있어 굽은다리라 불렸다. 두 마을을 합하여 굽은다리의 이름을 따서 곡교리라기도 함"},{"SUBW_ID":"2732","STTN":"강남구청","SBWY_ROUT_LN":"07호선","STTN_ORGN":"청담·논현·삼성 등 3개동의 경계부근(삼성동 8번지)에 위치하고 인근 강남구청으로 인하여 강남구청역으로 명명"},{"SUBW_ID":"2511","STTN":"방화","SBWY_ROUT_LN":"05호선","STTN_ORGN":"방화라는 동명은 산의 형국이 꽃 피는 모양이라고 하는 개화산옆에 발달한 마을이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으로 동명을 인용하여 방화역이라 명명하였음."},{"SUBW_ID":"2534","STTN":"광화문","SBWY_ROUT_LN":"05호선","STTN_ORGN":"광화문은 경복궁의 남정문으로써 당초 1395년(태조4년)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에 의해 사정문으로 명명되었으나 1425년(세종7년) 집현전에서 광화문으로 바꾸었다."},{"SUBW_ID":"2556","STTN":"올림픽공원","SBWY_ROUT_LN":"05호선","STTN_ORGN":"88 올림픽을 계기로 형성된 올림픽 체조경기장 등이 위치한 올림픽공원과 올림픽기지촌 및 선수촌 아파트가 위치해 있으며 인근에 한국체육대학교가 있어 역사명으로 명명됨"},{"SUBW_ID":"2563","STTN":"미사","SBWY_ROUT_LN":"05호선","STTN_ORGN":"미사리는 한강 가운데 위치한 커다란 섬으로 오랜 세월 동안 한강의 퇴적물이 쌓여 섬이 형성되었으며, 모래밭으로 둘러싸인 사면이 물결치는 것 같이 아름답다 하여 미사리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미사역은 하남시 미사지구의 중심이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SUBW_ID":"2614","STTN":"독바위","SBWY_ROUT_LN":"06호선","STTN_ORGN":"독박골은 독바위골의 줄임말로 독바위골의 바위가 독(항아리)과 같다해서 붙여진 지명이라는 설과 유달리 바위가 많아 숨기 편하다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다른 설에 의하면 인조반정 당시 일등공신이었던 원두표 장군이 거사 직전까지 숨어 지내던 독바위굴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SUBW_ID":"2615","STTN":"연신내","SBWY_ROUT_LN":"06호선","STTN_ORGN":"역이 있는 동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연신내라는 말은 연(延) 시내(川) 즉 연천(연서천)의 우리말 풀이가 변한 것으로 전하여지고, 일설에 의하면 조선조 인조반정 당시 능양군(인조)이 신하를 늦게 만난 개천이라 하여 연신내(延臣川)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SUBW_ID":"2611","STTN":"응암","SBWY_ROUT_LN":"06호선","STTN_ORGN":"마을 뒤 백련산 기슭에 있는 커다란 바위의 생김새가 마치 매가 앉아 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매바위골이라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이곳에서 사냥을 하기 위해 장막을 치고 포수들이 기거하던 곳이 여러곳 있었으며 궁중에서 나와 사냥터로 삼았던 커다란 바위가 있었던곳이다."},{"SUBW_ID":"2612","STTN":"역촌","SBWY_ROUT_LN":"06호선","STTN_ORGN":"역촌동은 조선조 신하들이 장거리 여행시 말이 쉬어 갈 수 있는 역(延曙驛)이 있어 역말이라 불리어 여기서 역촌이 유래되었고, 옛 지명으로는 마방촌, 토정리라 불리었다."},{"SUBW_ID":"2632","STTN":"한강진","SBWY_ROUT_LN":"06호선","STTN_ORGN":"한강진(漢江鎭)나루는 지형이 마치 오메가(Ω)모양으로 되어 있어 배를 갖다대기에는 천혜의 지형이었으며 강남의 사평(沙坪)나루(강남구 신사동)를 잇는 군사적으로나 물류면으로 매우 중요한 나루터였다. 특히 삼남지방(충청,호남,영남)의 물산과 많은 보부상과 선비들이 강남의 역삼동과 양재역, 말죽거리에서 몸을 풀고 건너오고 갔던 영고성쇠로 얼룩진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목멱산(木覓山, 남산)자락 고개(버티고개) 너머에는 조선조 때 수도방위와 왕실호위를 맡아보던 어영청(御營廳)의 분소인 남소영(南小營)이 있었는지라 나루터 이름도 군사적 의미인 한강진(漢江鎭)나루라고 하였는데 한강상류의 송파진, 하류의 양화진과 더불어 한강의 중간에 위치하여 서울의 남쪽을 지키는 군사상의 요충지였다."},{"SUBW_ID":"2637","STTN":"동묘앞","SBWY_ROUT_LN":"06호선","STTN_ORGN":"동묘는 중국 촉한의 명장 관우의 사당(보물 제142호)으로 원래 명칭은 동관왕묘이다. 임진왜란때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성스러운 관우장군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 여겨서 명나라 왕이 직접 액자를 써서 보내와 선조때(1601년) 창건하였으며, 그 후 영조15년(1736년)에 중수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SUBW_ID":"2533","STTN":"서대문","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서대문은 중국과 통하는 의주로의 관문으로 도성 서쪽의 정문이다. 서대문의 정식명칭은 돈의문이며 새로운 문이란 뜻으로 새 문, 신문이라고도 불렸다.\n<br/><br/><br/>1996년 12월 개통시 주변에 서대문이 있어 역명을 서대문역으로 정하였다."},{"SUBW_ID":"2536","STTN":"을지로4가","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을지로4가역은 우리나라 위인중의 한사람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성을 따서 붙인것이다.조선왕조때는 구리개로 불리던 이길은 1914년부터 황금정(黃金町)으로고친적 도 있다. 이곳은 을지로의 중심부인4가에 위치하기에 을지로 4가역으로 명명되었다."},{"SUBW_ID":"2542","STTN":"마장","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조선초기부터 말을 기르던 양마장이 이곳에 있어서 마장동이라 불리게 됨"},{"SUBW_ID":"2526","STTN":"신길","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샛강을 경계로 여의도와 마주보고 있는 신길동은 조선시대에 서울로 들어오는 영등포나루터가 있었던 곳이다.  신길동의 이름은 조선시대부터 포구로서 신기라고 불려진 마을로 새로 좋은 일이 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지어졌다고 한다."},{"SUBW_ID":"2528","STTN":"여의나루","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옛날 마포와 여의도를 잇는 나루터가 마포와 여의도 동쪽에 형성되어 교통을 원활하게 하였으나 한강다리 건설로 없어졌던 여의나루터에 1986년  유람선 선착장이 개장되었다.  여의나루 역명은 여의나루터 옛 명칭에서 유래한 것이다."},{"SUBW_ID":"2559","STTN":"개롱","SBWY_ROUT_LN":"05호선","STTN_ORGN":"조선조 인조때 의주부윤 임경업장군이 갑박산에서 고리궤짝을 주워 와서 현재 가락2동 개롱근린공원 위치에서 고리궤짝을 열어보니 투구와 갑옷이 나왔다하여 개롱이라 전해옴"}]}}